YS 김영삼 전 대통령 정치인생 정리

김영삼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역대 최연소인 26세의 나이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며 김대중과 함께 야권의 투톱으로 성장했고 언론 보도에서는 보통 이니셜인 YS로 지칭됐다.

김영삼은 5.16 혁명 쿠데타 세력의 군정 연장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었고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사주로 초산테러를 당한 바 있다. 1979년에는 뉴욕타임즈 인터뷰에서 '미국이 압력을 넣어 박정희 대통령을 제어해 달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의원직에서 제명(...)됐다.

전두환이 집권하자 김영삼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단식투쟁으로 저항했고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이 '김영삼을 구하라'는 손팻말을 들고 백악관에서 시위하는 모습이 외신에 생중계되면서 전두환은 개망신을 당한다.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인 1987년, 4.13 호헌조치를 통해 차기 대선을 체육관에서 치를 뜻을 밝힌다. 그러자 국민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들고 일어났는데 바로 6월 항쟁이다.

집권당인 민정당 대선 후보이자 12.12 쿠데타 주역인 노태우는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발표한다. 노태우는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에 김대중, 김영삼 둘 중 하나가 대선에 출마하면 당선 가능성이 99프로였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2개월 전 통일민주당을 창당한 상태였다. 김대중은 오랜 도피 생활로 당내 세력이 약화돼 경선을 하면 무조건 지는 상황이라 대권 니 갖고 공천권 나 주라며 김영삼과 딜을 하려 했지만 거절당한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오른쪽이 노태우 전 대통령

김대중은 김영삼과 개싸움 끝에 탈당(...)했고 그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되도 않는 4자 필승론을 내세우며 독자출마한다. 쉴드 불가능한 김대중의 병크로 후일 반성문도 썼다(...).

결국 김대중, 김영삼의 표가 분산됐고 노태우는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하지만 다음 해 치뤄진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이 제1 야당으로 부상하며 여소야대가 됐다. 똥줄이 탄 노태우는 총재직과 5.18 진상 규명을 댓가로 김대중에게 합당을 제의(...)했으나 퇴짜를 맞는다.

그러자 노태우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에게 합당을 제안했고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까지 끌어들여 1990년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하는데 요거이 바로 3당 합당이다.

3당 합당을 위해 통일민주당 해체를 선언하는 김영삼 총재에게 노무현 의원은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이 때문에 김영삼은 죽을 때까지 노무현을 극혐했다(...).

3당 합당(출처: 헤럴드경제)

김영삼은 1992년 대선에서 여유있게 승리,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원수지간이던 5.16, 12.12 쿠데타 세력들과 손 잡아 이뤄낸 결과였으나 12.12 세력의 핵심인 하나회 해체, 12.12 책임자 처벌, 5.18 진상 규명을 주축으로 한 역사바로세우기를 단행하며 태세전환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제1 야당인 평화민주당이 뻘쭘할 정도로 야당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전국 지지율 90%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국민 90%가 전라도 출신

사실 역사바로세우기의 목적은 정의구현이 아닌 민정계 숙청이었다 그게 그거. 이후 김종필도 쫓겨나는데 그가 탈당하며 한 말이 바로 토사구팽되겠다. 김종필은 후일 김대중과도 합당해 실세 총리까지 됐지만 역시 숙청당했다. 호구형

김영삼 대통령은 3당 합당에 대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 가야 한다'라고 언플했지만 애국보수로 전향하면서 스스로 호랑이가 되었다. 뒷끝도 있는 양반이라 대선에서 갈등 관계였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국민당을 해체시키고 현대그룹도 탈탈 털었다.

그래도 오랜 기간 동지이자 라이벌이었기 때문이지 김대중 총재와 말이 통했고 선을 넘지 않았다. 야당을 빨갱이 취급하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비하면 태평성대 시절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생전 마지막 모습(출처: 김현철 트위터)

금융실명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같이 김영삼 대통령 특유의 무대뽀 스타일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도 있었으나 아들 김현철을 비롯한 측근 비리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곪았던 사회 병폐가 뻥뻥 터지면서 지지율이 DTD한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서해페리호 침몰,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 같은 안전 사고로 총 1138명이 사망해 김영삼 정부는 사고공화국이란 별명을 얻었고 임기 마지막해를 IMF(...)로 장식하며 멸망한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무리한 사업확장을 했던 대기업들은 줄줄이 부도가 났지만 현대그룹은 김영삼 정부가 갈궈 긴축경영을 했기 때문에 재정 상태가 매우 탄탄했다(...).

퇴임 후 김영삼은 2006년 박근혜 대표가 커터칼 테러를 당하자 오지 말라는데도(...) 병문안을 가 '나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초산 테러 등 테러를 많이 당했다'며 위로했고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는 칠푼이'라고 일침했으며 대통령 취임식 때 꿀잠을 자는 등 개그 캐릭터로 변신했다.

김영삼이 발굴한 대표적인 정치인들로 노무현, 손학규, 김문수(...), 서청원(...), 김무성(...), 김영삼의 유산 이명박 등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을 평가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3당 합당으로 야당 텃밭이었던 부산, 경남(PK)을 애국보수 텃밭으로 만든 것에 대한 책임론이다. 하지만 경남 유권자들은 지역 대표 정치인인 김영삼을 보고 야당에 투표한 것이지 진보 성향은 아니었다. 선거는 어차피 출신 지역 인구 조사 아닌가(...).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15년 11월 22일 0시 21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떠날 때마다 인생 덧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