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길 탈당 횟수는? 탈당 이력 정리

정치인 김한길은 24년 동안 총 7번을 탈당했고 그 중 5번이 총선 또는 대선이 있는 해였다. 정치인생을 오로지 공천 정권교체를 위해 헌신한 그의 탈당인생을 되짚어 본다.

소설가 김한길은 1991년 발간한 <여자의 남자>가 대박이 나면서 네임드 소설가가 된다.

이듬해 민주당(일명 꼬마 민주당)에 입당해 서울 동작을 지구당 위원장을 맡지만 공천에서 탈락하자 미련 없이 정주영 현대 그룹 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입당하면서 짜릿한 철 탈당을 기록한다.

김한길은 통일국민당 부대변인에 임명돼 서울 동작을에 출마했지만 3등(...)을 차지한다. 통일국민당은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의 탄압으로 세가 크게 기울었고 1994년 박찬종의 1인 정당(...)과 합당하자 김한길은 개인통산 두 번째로 탈당한다.

이후 MBC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을 진행하다가 1996년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공천 후보로 내정되면서 방송에서 하차했지만 김대중 총재로부터 비례대표를 제안받고 잽싸게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다. 아직 신한국당 입당 전이었기 때문에 탈당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2000년에도 비례대표로 당선됐지만 5개월 후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의원직에서 사퇴한다.

김한길 방송 하차(출처: 경향신문)

그는 장관직 사퇴 후 다음해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구로을에 출마했지만 낙선한다(...). 당시에는 비례대표 재선이 가능했고 국회의원의 장관직 겸직이 금지됐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으로 헤쳐모여하면서 김한길도 동반 탈당해 탈당 3호를 기록한다. 다음해 총선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대한 반발로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고 김한길도 서울 구로을에서 당선된다.

이후 김한길 의원은 당내에서 독자 세력를 만들어 2006년에는 원내대표에 선출되기까지 했지만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한 자릿수가 되자 2007년 2월, 계파 의원 22명과 함께 통산 4번째 탈당을 하고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을 만든다.

그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집단 탈당 소문에 대해 '기획 탈당을 통해 창당하려는 노무현 프레임'이라며 '민주당 없이는 통합이라 할 수 없다'고 일침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한 그 민주당말이다.

김한길 '노무현 프레임'(출처: YTN)

하지만 김한길계가 6개월 만에 탈당하면서 김한길 의원은 탈당 5호를 기록했고 민주당 없이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한다. 그는 대선 후보로 정동영을 지지하며(...) '노무현 프레임을 극복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한길이 당권 싸움은 메시 급인 반면 지역구에서는 경쟁력이 없었다. 1회 당선이 전부이며 그마저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가능했다.

재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그는 2008년 1월, '오만과 독선의 노무현 프레임을 극복하지 못 했다'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6번째 탈당을 기록한다. 즉, 노무현 프레임 때문에 원내대표까지 해 먹었지만 오만과 독선의 노무현 프레임 때문에 은퇴하겠다.

3년 뒤인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퇴(...)하면서 김한길은 서울시장 선거 출마 의사를 밝히고 정계 복귀를 타진한다.

하지만 지지율이 1%(...)를 밑돌자 '정권교체를 위해 기여하겠다'며 출마를 포기하고 '지도부의 무능과 계파싸움 추태에 당이 상처받고 있다'고 꾸짖었다.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출처: 민중의소리)

2012년, 김한길은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에 의해 인재영입위원으로 발탁되면서 4년 만에 정계에 복귀한다. 이후 광진구갑에 전략공천돼 이명박 심판론과 노무현 동정론, 상대방 후보의 낮은 지명도에 힘입어 재선에 성공한다.

그해 6월, 그는 당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해 '2002년,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포기할 수 없어 노무현 대통령 후보 캠프에 합류했다'며 지지를 부탁했다. 그리고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을 포기하고 떠났다(...).

그는 '이런 정치를 노무현 대통령이 본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라며 호소한 끝에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노무현 프레임 때문에 정계은퇴했다는 사람이 노무현 팔아 최고위원이 된 것을 본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2013년, 김한길 의원이 민주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처음으로 김한길계가 당권을 차지했고 이듬해 3월에는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 추진위원회와 합당해 공동대표에 오른다.

취임 후 첫 선거인 6.4 지방선거는 세월호 정국에 힘입어 신승했지만 7.30 재보선은 친노를 견제하기 위해 전략공천을 남발하다 폭망해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는 사이좋게 사임한다.

2015년 2월, 문재인 의원이 새 대표로 선출되자 김한길 의원은 뒤로 빠지고 이종걸 원내대표, 주승용 최고위원, 최재천 의원 등 김한길계 중진들이 친노 패권주의 타령을 시작한다.

20대 총선이 다가오자 김한길계를 비롯한 비주류는 당권정권교체와 공천권통합을 위해 문재인 대표의 사퇴를 요구했고 안철수 의원이 가세하면서 김한길계는 측면 지원에 나선다.

문재인 대표의 사퇴 거부로 안철수 의원은 새정연을 전격 탈당하고 안철수 신당 지지율이 낮게 조사되자 당장 탈당할 것 같았던 김한길 의원은 쓸쓸히 문재인 대표의 사퇴를 촉구했다.

김한길 의원 탈당 기자회견(출처: 오마이뉴스)

그러나 종편들이 안철수 의원을 밀어 주면서 안철수 신당 지지율이 대폭 상승했고 김한길 의원은 2016년 1월 3일 탈당을 선언, 7번째 탈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다. 평화왕 종편

그는 '총선승리와 정권교체를 위해 다시 시작하려 한다'면서 '패권정치의 틀 속에 뻔한 패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일침했다. 즉, 당원들의 투표로 후보를 결정하는 것은 패권정치이며 김한길이 당권을 잡으면 새누리당 콘크리트가 거짓말처럼 야당을 지지하게 된다.

이어 '안에서 싸우다 기운을 다 소진해버리는 그런 정치 말고, 계파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그런 정치 말고, 비리막말로 얼룩진 그런 정치 말고, 이제는 국민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정치로 변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오오 라임 오오

문재인 체제 출범 후 끊임 없이 당권 싸움을 한 건 김한길계고, 인사권을 요구한 것도 김한길계고, 성완종 사건으로 검찰소환 통보를 받은 것도 김한길 의원이고, '노무현 대통령님 문제 제기가 되자 뛰어 내리셨다. 그 결과 민주당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하게 됐다'고 말한 유성엽 의원도 김한길계다.

1월 7일, 김한길 의원은 안철수 신당 <국민의당>에 합류하며 당내 최대 계파가 됐다. 우리 김한길계가 국민의당을 장악했으니 총선 승리와 정권 교체는 기정사실이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