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태 위인전 1: 원조 친노, 리틀 노무현, 쇠고기청문회

조경태는 1986년 부산대학교 토목공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발을 들인다. 시위에서 야무지게 싸운다고 해서 운동권 내에서 떠오르는 샛별로 불렸다고 한다.

1988년, 그는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부산 동구 후보로 출마한 노무현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며 정치와 인연을 맺는다.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은 경남이 안방이었기 때문에 노무현 후보도 여유있게 당선된다.

1995년, 대학 강사였던 조경태는 구포시장 노점상 단속현장에서 대야를 뺏긴 상인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정치를 하기로 결심한다. 근데 단속 뜨면 노점상들이 먼저 대야 엎고 나중에 계속 장사한다(...).

이듬해 조경태는 28살의 나이에 통합민주당 부산 사하구 갑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지만 15.5%를 득표하는 파란을 일으킨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사고공화국 소리를 듣긴 했어도 부산이 텃밭이었고, 통합민주당 또한 김대중 총재가 새정치국민회의로 헤쳐모여하면서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28살(...)이던 김범수 조경태의 선거 포스터

조경태는 1998년, 서울 종로구 보궐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의 당선을 도와 노무현 의원의 비서관이 된다.

하지만 2000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사하구 을에 공천을 신청했고 탈락하자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한다. 그는 같은 지역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박종웅 후보에게 압살당했다.

2002년, 노무현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연석회의에서 한 의원이 지지율이 급락한 노무현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자 조경태 지구당위원장이 나가려면 당신이 나가라고 격렬히 항의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노무현 후보로부터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고 이후 정책보좌관에 임명된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지만 조경태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한 것 외에는 별다른 보직을 받지 못 했다.

노무현 대선후보 사퇴 요구에 항의하는 조경태

후일 조경태는 '참 열심히 싸웠는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는다는 말처럼 돼 버렸다'고 회고했다.

2004년, 그는 부산 도시철도 1호선 연장을 약속하며 열린우리당 사하구 을 후보로 출마했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과 공천에서 탈락한 박종웅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애국보수 표가 분산되면서 2000표 차로 당선된다.

그는 부산 유일의 열린우리당 의원이 됐고 노무현 대통령처럼 낙선을 무릅쓰고 부산에서 계속 출마했다며 리틀 노무현이란 별명이 붙었다. 조경태가 사실 친노 운동권 출신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 도시철도 1호선 연장을 승인하면서 조경태는 공약을 지켰고 2008년 총선에서 부산 1호선 다대포 연장을 공약으로 내건다. 전차남

노무현 정부의 인기가 바닥을 치면서 친노와 함께 통합민주당은 총선에서 개발살났지만 조경태는 평소 지역구 관리를 잘했고 애국보수 표가 또 다시 분산되면서(...) 2100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 경상도 유일의 통합민주당 의원이 된다.

정운천 장관 극딜하는 조경태 의원(출처: KBS)

조경태가 캐쥬얼 정치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2008년 소고기청문회였다.

그는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에게 '미국인 95% 이상이 20개월 이하의 소고기를 먹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면서 무슨 장관 자리에 앉아 있느냐'면서 '값 싸고 질 좋은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사줄 테니 많이 드시라'고 호통쳐 '조포스', '버럭 경태'란 별명이 붙었다.

조경태 의원은 5공 청문회에서 명패를 집어던지며(...) 스타로 부상한 노무현 의원과 비교되며 또 다시 리틀 노무현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개인적으로 영광이나 전임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들은 참모지만 나는 정치적 동지 관계'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형 사후인 2010년, 이명박 대통령 측근들의 사조직인 영포회 특혜 논란이 일자 조경태 의원은 '영포회는 호남향우회같은 향우회인데 억울한 측면이 있다'며 민주당이 자기들이 한 것은 모르고 비난하는 건 잘못이라고 꾸짖었다.

다음 편에 계속.